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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순흥 안씨의 수난(受難) 사건(事件)

by 산사나이ys 2009. 5. 16.

순흥 안씨의 수난(受難) 사건(事件)


우리 순흥안씨가 800년을 내려오는 동안

크게 볼 때 세 번의 수난을 당했다.  그때

마다 우리 선조들은 난을 피하여 낙향(落

鄕)의 길을 걷는 등 슬기롭게 대처해 왔다.


세  번의  수난은 그 원인에 있어 우리 조상

들의  잘못한  적은  없었고 언제나 정쟁(政

爭)에 휘말려 상대방의 모략과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사실이 밝혀

지고 복권(復權)이 되고 명예를 회복했다.

 

 


1. 순흥의 금성대군(鎬城大君) 사건

 


금성대군은 이조 세종(世宗)의 여섯 째 아들로서

휘는 유(瑜)이다.


 단종 (端宗)이 즉위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딴 뜻을 품고 있음을 알고 금성대군은 단종의 편

 에 섰으나 끝내 찬위(纂位)를 막지 못 했다.


 그  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사건에 관련되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로 유

 되고 금성대군은 순흥의 패도(貝島)로 유배되였다.


 이 패도는 죽계천에 있는 명목상의 섬에 지나지

 않는다.  금성대군이  순흥에  유배돼 있는 동안

 이보흠(李甫欽)  순흥 부사와  심기  상통하였고

 우리  순흥 안씨는  그곳의 호족(豪族)으로 많이

 살고 있었다.


1456년 금성대군과 이보흠 부사 그리고 그 지방

호족들과의  단종복위  계획이  탄로되어 안동의

관군이  순흥을  쑥밭으로  만들었고  또  서울의

철기( 鐵騎) 군이 순흥을 다시 휩쓸었다.


결국 금성대군과 이부 사는 모두 옥사했고 순홍의

주민은  재판도  없이  닥치는  대로  타살되어  

피가 죽계천에 십리(4km)를 흘렀다고 한다. 그 피

가  그친  곳이  지금의 「피끈」이라는  동네이다.


  이  난으로  인하여 우리 안문은 역적으로 몰리고

그 후 약 200년 동안 순흥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니

시조님을  위시하여  127l의  선조님의 묘소가 이로

인하여 실전되었고 1704년에 복권이 되었다.

 


2. 안당 (安塘) 선조와 신사무옥(辛巳誣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좌의정이었던 안당

(13世 安塘 貞愍公 ) 선조는 조광조(趙光祖)

의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였으니 결국 자기

도  하옥(下獄) 되고  2 년 후 안처겸(安處謙

- 安塘의 아들)의 모의 사건으로 처겸(處謙)

처근(處謹) 형제 외에  권전, 이충건(李忠建)

등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안당 선조도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이에 관련되어 피해를 입은 우리

순흥안씨를  보면  안정(安挺), 안찬(安瓚)

안경우(安景祐)   안숭복(安崇福)   안처순

(安處順) 등  선조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말았다.

 

이때 우리 순흥안씨 가운은 큰 타격을 받아

전국  각지로  낙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안명세(安名世) 선조사건

 

1545년  대윤(大尹)과  소윤(少尹)의  반목으로

비롯된 을사사화 때 안명세(14世  安明世 輪林

公) 선조는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서  사국

(史局)에 있었는데 을사사화 전후의 실상(實相)

을   그대로  사초(史草)에  기록했는데  그것을

간신배들이  고해  바처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불과  4년도  못되어 겨우 정팔품(正八品 )에서

참화를 당하고 말았다.


 그가 사형을 당할 때에 당당했음을 기술한 바다.

이로  인하여  우리  순흥 안문은 또 수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안명세  선조는  그  후  l570년  선조(宣祖) 때에

사면되어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증직

이 되였다.

 

출처 : 순흥안씨찬성공파
글쓴이 : justi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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